냉소와 탈권위 사이에서, 살짝 비틀어 세상을 보다

냉소와 탈권위 사이에서, 살짝 비틀어 세상을 보다

냉소와 탈권위 사이에서, 살짝 비틀어 세상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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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3평화문학상 수상자' 제주 원로 소설가 양영수 씨가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분량은 짧지만 반전과 여운을 남기는 꽁트 소설을 격주로 [제주의소리]에 연재한다. 일명 '양영수의 스마트소설'이다. 모바일 인프라가 널리 보급된 시기에, 스마트폰으로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꽁트를 독자들에게 소개한다는 취지다. [편집자 주]   글 내용을 바탕으로 제작한 AI 이미지 ⓒ제주의소리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 태산이 높다하되 내 코 아래 뫼이로다 20세기 초부터 모더니스트라고 불리는 예술가들은 조락기凋落期에 처한캐피탈대출상담
인류역사와 문명을 재충전 부활시키는 거창한 테마와 비전을 제시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들의 예술운동은 웅대하고 의욕적이었지만, 그것은 일부 특수층 사람들 중심으로만 공감을 일으켰고, 다수의 대중들에게는 난해한 암호처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모더니즘 예술운동의 진면목은 20세기 말에 널리 유포되기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 물결에 의해 드러났집담보대출한도
다고 할 수 있다. 인간역사를 설명하는 학문과 예술이 그렇게 거창하고 난해해 보이지만, 사물의 진실과는 거리가 멀고 정직한 삶의 실상은 뜻밖의 비근한 처소에서 이루어진다는 얘긴데, 사상적으로는 해체론解體論이고 예술적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이고, 종교적으로는 다원주의와 세속주의가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영구불변의 진리를 불신하고 그 대신에 상대적이고 가변국민은행서민전세자금대출
적인 진실을 신봉한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대비시키는 재미있는 예는, 영원하고 당연한 것처럼 보이던 고전적인 교훈이나 명작 명구名句들을 가볍게 던져버리고 새롭고도 깜찍한 패러디 표현으로 대치하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요즘 사람들의 대체적인 성향과도 크게 상통한다. (패러디는 '사고의 틀'인 패러다임paradigm을 바꿈으로주민등록등본
써 원작에 대한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개작을 시도하는 것임.) 예전에는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였는데 새로 등장한 패러디는 "태산이 높다하되 내 코 아래 뫼이로다"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관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말일 것이다. 태산 같은 세계를 내려다보고 설명하거나 지배함에 있어서 하늘 같이 높고 거창하고 위엄있는 권위를 빌릴내 사랑 당신
필요가 없이 나 혼자의 기준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냉소적이고 해학적이면서도 우리가 사는 세계의 실상을 더 잘 보여주는 것도 같다.  요즘은 태산보다 더 높은 하늘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시대이다. 기성세대 어른들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지난 역사 이야기나 현재 세상 사는 이야기를 알고 싶으면 인터넷 정보 검색창을 열어보면 부산저축은행피해자
된다. 집안 어른이나 학교 선생이나 선배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고 도서관의 오래된 책을 들여다 볼 필요조차 없다. 그 쪽이 더 빠르고 정확하다. 적어도 젊은이들은 그렇게 믿는다. 꼭 같은 내용의 말이라도 남에게서 들은 말보다도 자기가 직접 정보 검색을 해본 것이 더 실감이 나니까, 태산이 내 코 아래에 있다는 말이 나온다. 나보다 연장자들의 말을 들어주어야 sbi저축은행 연봉
하는 모임들, 문중회, 향우회, 총동창회 등은 인기가 떨어진다는 말이 실감 나는 시대이다. 같은 또래나 같은 취향의 동호인 끼리 모이는 것이 성황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모든 시대사조가 그런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계도 명백하다. 지식이나 기술 등 수단적인 것은 자기 혼자의 힘으로 얻을 수 있지만, 인격이나 성품 등 단순한 수단 이상으로마이너스통장 이자
인생의 향기와 목적에 관한 것은 혼자의 힘으로 얻기가 어렵고 인생 선배들과의 만남이 필요할 것이다. 자기가 선 곳보다 높은 곳에 하늘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다가 쓰러지는 사례는 정치권력의 부침을 보면서 알아보게 된다. 중국 현대사의 권력투쟁 실상이 특히 그렇다. 주은래와 등소평은 끝까지 모택동과 협력하여 중국의 공산주의 정착을 위해 헌신 노력한 사람들이지만접대비
, 권력의 정상인 모택동의 국가운영에 협력하고 조신함으로써 제2인자로서의 위신과 안전을 지킬 수 있었다. 반면에 유소기, 임표 등 몇 사람은 하늘 같은 권력의 정상을 탐하다가 무자비한 숙청을 당해야 했다. 조선시대에도 그런 분에 넘치는 권력욕 때문에 후세인들의 원망을 듣는 인물들이 있었다. 자기 조카 단종을 죽인 수양대군이나 자기 아들 고종 임금을 배제하고중소기업이업종중앙회
독단적이고 망국적인 국정 농단의 과오를 범한 대원군이 그 대표자일 것이다.  종교 활동의 경우에도 태산보다 높은 하늘의 존재를 무시하는 사례를 보게 된다. 대부분의 종교 교단 지도자들은 진리 여부의 최종 판단이나 결정권을 자신에게 두지 않고, 하느님이나 부처님, 혹은 이에 비견되는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에 의존한다. 그것이 오히려 자신의 권위 유지에 도움이 되거니와 추종자들의 믿음을 얻기에도 유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반면에 자신을 새로 창설된 교단의 교주로 참칭하고 신도들을 끌어 모으는 예가 있다. 심지어는 자기가 재림한 예수라고 호언하는 교주들도 있다고 한다. 온갖 지식과 정보가 흘러넘치는 요즘같은 투명 사회에서 이 같은 예가 그전보다 적어지기는커녕 더 많아지고 있다니, 이것도 역사의 진실에 대한 확신이 희박해진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예일까 싶다. 대중소설에 속하는 범죄소설의 끝 장면이 열린 결말(open ending)로 종결되는 것도 포스트모던적이라고 한다. 등장인물은 여럿인데 범죄인이 누구인지 모른 상태로 끝나는 것은 객관적 진리에 대한 믿음이 상실된 시대풍조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나름대로의 재미는 있을지 모르지만, 작가의 나태함의 표현같이도 보인다. 이 같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제일 곤혹스러운 것은 아이들 교육이다. 혼란스러운 사회풍조를 어느 정도로 받아들이고 가르칠 것인지, 개성의 자유를 존중하느냐 엄정한 규율을 존중하느냐,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소설 쓰는 사람으로서 한 가지는 권할 만한 방법이 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이런 경구警句에서 찾을 수 있는 인생의 지혜를 포스트모던 물결의 한가운데에서 활용하는 것이다. 가령 집에서 어린 아이의 못된 버릇을 바로잡으려는 엄마가 자기 훈시의 위신과 효과를 더 크게 하려면 자기 아닌 다른 사람, 아이의 관심과 존경을 엄마보다 더 크게 받을 만한 아빠나 자기 집안 조상이나 역사상 인물을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의 사랑과 인정까지 얻게 하려는 엄마의 마음에 대해 아이들은 감동하고 존경까지 할 것이므로 교육효과가 좋을 것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 사랑은 짧고 인생은 길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하면, 이건 엄숙하고 경건한 교훈일 것이다. 사람 수명은 얼마 되지 않으니까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보람난 일을 하여 삶의 족적을 후세에까지 남겨야함을 지적한 것은 훌륭한 가르침임에 틀림없다. 이에 반해서, 인생이 길다고 말하는 것은 인생은 길고 시절마다 굽이굽이 다른 색깔 다른 모습으로 변하게 마련이니까 그 때마다의 특색을 잘 알고 즐기라는 것인데, 이것 또한 논리적으로 틀린 것은 없어 보인다. 옛날보다 사람 수명이 길어졌다는 사실과 관련될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랑은 짧은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니, 사랑의 의리와 순결은 어디 간 줄 모른다. 사랑이 짧다고 말하는 것은, 순간순간의 사랑을 허투루 지나보내지 말고 찐득하고 뜨겁게 하라는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평생 지속되는 사랑보다 변하고 헤어지고 원망하는 사랑 이야기가 인기 있는 대중가요나 연애소설의 소재가 아닐까.  단 한 사람하고만 백년해로를 한다는 것은 그 인내심과 포용력과 이해심이 존경의 대상은 되겠지만, 도덕적인 의무감과 전통적인 사랑 방식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 요즘 사람들의 사랑 스타일일 것 같다. 이혼이나 졸혼이 부끄러운 일이 아닌 세상이다. 사랑의 대상이 바뀌면 더 성숙한 사랑이 될 수도 있고, 순진한 사랑이나 대담한 사랑이나 제각각의 의미와 재미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인생과 역사에서는 어차피 절대적으로 옳은 것을 찾기가 어렵다고 보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한번 실패했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고, 내가 겪고서 실망한 사랑은 인생의 한 국면에 지나지 않은 것이니, 다른 국면도 있음을 알고 심기일전하여 다시 시작하라는 얘기이다. 옛날식 고전적인 가르침은 규범적이고 엄숙했음에 반하여 포스트모던식 가르침은 냉소적이고 해학적이라 할 것이다.  예술은 자연(인생)을 모방한다 / 인생은 예술을 모방한다 오늘날 엄청난 양으로 고도화된 정보 전달의 미디어는 인생의 리얼리티를 단순히 재현再現(representation)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재구성再構成(reconstruction)한다. 이제 미디어는 더 이상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며, 오히려 현실이 미디어를 비추는 거울일 경우가 더 많아지는 것이다. 종전에는 미디어라는 거울이 실재세계를 보기 위한 보조수단이었는데, 오늘날에는 거울 속의 이미지를 기준으로 하여 실재세계를 바라보게까지 된 것이다. '예술은 인생(자연)을 모방한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오랜 리얼리즘 강령을 뒤집어서 오스카 와일드는 '인생이 예술을 모방한다'고 말했는데, 이 말은 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을 부분적으로 계승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양쪽에 공통된 구호라고 할 수 있다. 현실세계에서 겪었던 경험을 예술작품 속에서 확인하던 것이 옛날 풍속이었음에 비하여, 이 시대에 와서는 예술작품 속에서 경험하는 발견과 감동을 현실세계 속에서 확인하게 된다는 말이다. 예술작품은 실재세계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전해주는 일종의 문화 매체媒體이지 실재세계 자체는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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